사진 1. 『사진엽서로 보는 근대풍경 8 : 조선인 ․ 관제엽서(부산박물관, 2009)』310쪽.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복궁을 결정적으로 파괴할 행사를 추진하였는데 이른바 ‘조선총독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간 열기로 하고 그 장소로 경복궁을 선정한 것이다. 이 행사를 경복궁에서 개최한 이유는 경복궁을 파괴하고 새로운 청사를 건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복궁의 파괴는 조선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일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신청사 착공 직전인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라는 대규모 행사를 경복궁에서 거행하면서 경복궁 내 많은 전각을 훼손하여 부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는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게 됨으로써 변화한 조선의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조선왕조의 무능함을 입증하고 근대일본제국의 유능함을 과시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사진 1>은 1915년도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 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사진이다. 미술관 앞에 원주 법천사에서 옮겨온 지광국사현묘탑 부도와 이천오층석탑이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미술관 건물은 공진회가 끝난 뒤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되었다.
2) 조선물산공진회보고서 수록 이천오층석탑 관련 자료 보고
(1) 개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는 1915년 9월 11일부터 같은 해 10월 30일까지 경복궁을 주 무대로 하여 개최된 박람회이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래 일본의 식민지배 성과를 홍보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정식명칭은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施政午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 이하 공진회)’이다. 공진회는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을 위한 부지 확보의 목적도 겸하고 있었다.1)실제 조선총독부는 공진회의 주요 무대인 근정전 정면을 청사 신축 부지로 선정하고 앞서 설치된 공진회 행사장 건물들을 일부 해체하여 총독부 청사 건축을 위한 재료로 사용했다.2)총독부는 1916년 3월 공진회 준비와 진행 사항 등을 기록한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보고서(施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報告書, 이하 보고서)』를 발행했다.3)
보고서 안에는 이천오층석탑의 반출 경위 등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들도 수록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첫째, 보고서 1권 2장 4절의 공진회직원명부(共進會職員名簿)를 기반으로 기왕 조사한 고적조사위원들에 대한 정보이다. 추가 사항 및 새롭게 확인된 인물들의 신상을 조사 했다. 둘째, 3장 4절에서 보이는 미술관 정면 불교미술석조물에 대한 공진회 주최 측의 인식이다. 셋째, 13장의 각도의 협찬회 특히 경기도지역 협찬회와 관련된 내용을 소개했다. 이하 보고서의 관련 내용을 소개하고, 상세한 내용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보고서의 사본을 참고자료로 첨부하였다.
(2) 이천오층석탑과 반출과 공진회 참여자의 개연성
보고서 1권 2장 4절은 공진회에 참여한 인물들의 이름과 직책 등을 소개하고 있다. 1914년(大正 3)과 15년(大正 4년), 두 차례에 걸쳐 모임이 진행되었다. 공진회 준비 모임은 총독부 직원들과 초빙된 외부 인사들이 함께 참여하였다.4)이 가운데 공진회 사무위원으로 보임된 이와이 쵸사부로(岩井長三郞), 고오리야마 사토시(郡山智)는 1918년(大正 7) 고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된 이들이다.
출품작을 심사하는 심사 관련 분야에는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심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세키노 테자부로(關屋貞三郞)도 심사부장 겸 본부 몫의 공진회평의원으로 보임되었다. 이들 외에 주목해 볼 인물들은 철도와 세관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과 이후 총독부 청사 신축에 중요 역할을 담당하는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의 참여 인데, 명단과 상세 행적은 다음의 표와 같다.
표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총독부 영선과 기사로서 이후 조선총독부 건축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구니에다 히로시와 1921년(大正 10)까지 인천세관 경성출장소에서 감정관보(鑑定官補)를 지낸 노자키 렌페이(野崎廉平)이다. 이들은 고적조사위원을 역임하는 이와이 쵸사부로(영선과 기사), 고오리야마 사토시(1920년 인천세관장 전임) 등과 함께 이천오층석탑을 반출하는데 필요한 평가를 하는 실무적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세관 문제 외에 건축 관련 기사들을 주목하는 것은 당시 일본인 건축기사들과 건축 청부업자들의 유착이 극심했기 때문이다.5)
No
성 명
본래 직위
공진회직위
이후 행적
비고
1
國枝博
총독부 기사
사무위원
조선총독부 건설에 중추적 역할
2
朝田信太郞
철도국 서기
사무원
3
稅田谷五郞
세관감정관 겸 기사
심사관
1930년대 부산에서 사업가로 전직. 조선수산신문 감사, 골프 보급
부산
4
相澤毅
세관기수 겸 기수
심사원
수산관련 업무 부산세관 검사과
부산
5
野崎廉平
세관감정관보
심사원
21년까지 인천세관 경성출장소 감정관보 역임
표 1. 이천오층석탑 반출 개연성 인물 추가 명단
(3) 공진회 당시 이천오층석탑의 위상 및 인식
미술관-심세관 사이 정원 도면(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보고서 제1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보고서에서는 이천오층석탑을 3장 ‘會場內施設物’ 중 미술관 부속이 아닌 여러 시설조(3장 제4절 諸施設)에서 정원의 장식물로 취급하였다. 보고서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원의 범위는 미술관과 심세관(審勢官) 사이를 비롯하여 중앙음악당 등 총 3개소 약 1천여 평이다. 여기에는 프랑스식 화단을 설치하도록 했다.
본 조사와 관련해 여러 시설조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단 설치 다음 문장이다. 보고서에서는 정원내 각소에 개성(開城), 원주(原州), 이천(利川) 등 각지에 있는 한국 고대의 불상과 석탑 류 등을 배치해 풍취를 더 했다고 서술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원주의 것은 현재 경복궁에 위치해 있는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으로 추정되며, 이천은 ‘이천오층석탑’이다. 개성의 것은 창경궁 내 소재한 ‘고려오층석탑’ 으로 보인다.
제반 시설의 하나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미술관 전시품 목록이나 도면 등에 ‘이천오층석탑’은 나타나지 않으며, 공진회 이후 총독부 미술관․박물관 소장품으로 이관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도면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정원 및 미술관 관련 이미지 자료이다. 불상과 석탑을 배치하는 비용으로 총 1,286엔이 지출되었다.
공진회 당시 정원 부지 및 미술관 관련 도면
미술관 1층 도면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보고서 제1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공진회 당시 정원 부지 및 미술관 관련 도면
미술관 2층 도면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보고서 제1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시정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미술관 앞에 배치된 이천오층석탑의 약식도면
(국가기록원 일제시기 도면 컬렉션 DB에서 발췌 )
1) 총독부 신청사의 건축 비용은 1911년부터 요구되고 있었고, 1916년 총 경비 300만 엔(圓)으로 공사에 착수하게 된다.
2) 김동현 역, 1995 『總督府廳舍新營誌』, 국립중앙박물관 56쪽.
3) 보고서는 총 3권으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4) 김인덕, 2010 「시정5년기념공진회와 미술관 전시에 대한 소고」『한국민족운동사연구』 64, 한국민족운동사학회
5) 이금도, 2007 「朝鮮總督府 建築機構의 建築事業과 日本人 請負業者에 關한 硏究」, 부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